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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말, 논쟁, 명분, 실리... 조선 시대 지배층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긍정적으로 표현하든, 부정적으로 표현하든, 이 단어들은 어김없이 등장했고, 지금까지도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영화 <남한산성>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겁겠다”라고 생각했다. 당연하다. 400페이지에 가까운 소설은 어느 한번 빈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380년 전의 스산한 겨울의 분위기를, 초췌한 백성들의 처참함을, 각기 다른 생각으로 왕과 나라를 생각하는 어느 신하들의 절규를 고스란히 전달했다. 글 하나가 문장 하나가 생명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영화로 옮겨지면서 소설이 보여주는 스펙트럼은 줄어드는 대신, 한 곳에 집중해 밀도감을 높였다. 백성과 병사들의 이야기는 줄어들었고, 왕과 신하들의 이야기 즉 지배층의 스토리에 초점을 맞췄다. 앞서 언급한 글, 말, 논쟁, 명분, 실리가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남한산성>을 중심적으로 가득 채우는 것은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의 말(言)이다. 순간의 치욕을 참더라도 조선의 명맥을 이어가려면 청나라에 항복을 해야 한다는 명길과 대의를 위해 끝까지 청과 싸워야 한다는 상헌의 논쟁은 영화 지분의 8할 이상이다.

이들의 논쟁이 다른 신하들의 흐름을 잡고, 인조(박해일)의 생각의 방향을 제시하며, 청의 움직임을 예측케 한다. 관객도 마찬가지다. 상헌의 말에 따라가다가, 명길의 말을 이해한다. 그러다가 다시 상헌의 입에 눈길을 보내다가, 명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이들의 말은 충돌해 부서졌다가 다시 합쳐지고, 그 과정에서 갈려서 빛을 내다가 굳건한 칼이 된다. 상대를 베기도 하고, 나를 지키기도 하지만 거꾸로 상대의 힘(생각)을 키운다.

과거 어느 이가 통찰력 있는 이들의 논쟁은 무협지 속 고수와 같다는 말을 했는데, 이병헌과 김윤석이 보여주는 최명길과 김상헌의 논쟁이 그러한 느낌을 준다.

영화와 소설 속 명길과 상헌은 분명 왕과 국가를 위한다. 결과적으로 누가 맞고 틀리다를 논할 수 없다. 그건 결과론적인 해석이고, 그 시대를 살지 못한 후손들의 일방적 판단이다. 하다못해 항복문서를 쓰지 않으려 하는 대신들, 즉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부정적으로 남기지 않으려는 이들의 모습도 어느 시점에서 판단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최명길이 후세에 다양하게 평가되거나 김상헌이 이와 대비돼 평가되는 등의 역사적 사실은 논외로 하자)

이들 명길과 상헌의 말의 겨룸에 간간히 의지를 내보이는 인조의 말도 얄팍하긴 하지만, 스스로 힘을 발하긴 한다. 다른 신하들의 말이 공감 안되는 명분과 스스로의 삶을 위한 것으로 비쳐진 것에 비해 그나마 인조의 말은 주체적 이려고 애 쓴다. (이 부분에서 박해일 캐스팅이 안성맞춤이라는 평가도 있다. 나약한 이미지이면서도 자존심은 놓으려 하지 않는 지질함을 잘 드러내는 배우라는 평)

앞서 언급했듯이 이런 말의 부딪침에 포인트를 맞추다보니,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공간의 스산함과 백성들의 고단함의 표현은 다수 무뎌졌다. 그 때문일까. 서날쇠(고수)와 동생(이다윗)의 존재감은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다. 도리어 소설에서는 흐름의 한 축을 맡았던 서날쇠가 영화에서는 존재감이 흐려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수라는 배우의 존재감이 서날쇠라는 인물의 역할의 방향을 틀어버린 것이다. 소설의 서날쇠는 시대를 보여주고, 백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였다면, 영화 속 서날쇠는 갑자기 영웅이 되어 있다. 한낱 대장장이가 무관을 손쉽게 제압하고, 군대의 눈을 피해 도망가는 수준이니 말이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상업적으로’ 잘 만들었다. 누구의 말처럼 영화를 본 후에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명길과 상헌의 입장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49일간의 어두운 시대상을, 치욕적인 조선의 역사를 그려낸 영화 치고는 짙은 여운은 의외로 없는 편이다. 보는 이들마다 다르겠지만, <광해>의 경우에는 몇 번을 보더라도 여운을 남기는 포인트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 부분에는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광해>는 감성을 건드리는 연출이었다면, <남한산성>은 이성을 표현하는 연출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광해>는 인물과 인물이 감정을 섞었지만, <남한산성>은 말과 말이 충돌하고 갈린다. 여운은 감성을 건드릴 때 나온다. 이것이 흥행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예상할 수 없다. 배우들의 호연에 무게를 둘지, 여운에 무게를 둘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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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해소리
                

 "젊은 기자들은 정보를 장악해서 사실에 접근하는 고통스런 훈련을 기피한 채 너도나도 멋쟁이 문장가로 변신해가고 있다.....당대의 사실을 풍문으로 방치하는 것은 기자의 죄악이고 당대의 풍문을 과거의 비화로 팔아먹는 것은 기자의 더욱 큰 죄악이다. 우리는 비화 없고 풍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것이 내가 안느 정희상 기자의 꿈이다" - 김훈-


진지함을 잃어버린 세상이라고들 말한다. 난 언제나 그 몫을 언론의 직무유기에서 찾는다. 제대로 돌아가는 세상을 위해 바뀌어야 되는 부분을 처절하게 파헤쳐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 흔치 않다.


검찰과 경찰은 사실을 가지고 논하는 사람들이지, 진실을 정립하고 세상에 알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법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이지, 억울함과 슬픔을 논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어쩌면 글쟁이들이 - 기자, 소설가 등 - 바로 이 몫을 해야 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몫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그 일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그 고개를 돌린 문제에 접근하는 한 기자의 수첩속 이야기다.


이야기는 6개다. 김훈중위 의문사 사건, 56년만에 울리는 문경주민 양민 학살 사건, 김형욱 전 중정부장을 죽였다고 밝힌 특수 공작원 천보산의 암살 고백, 히로시마 피폭 2세 김형률씨의 삶과 죽음, 양심선언 현준희씨의 10년 투쟁 기록, 그리고 친일파 후손의 조상땅  찾기 과정..하나의 현대사를 그대로 써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내용만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어쩌면 이 스토리를 통해 저자인 정희상 시사저널기자는 후배기자들에게 그리고 기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반성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자는 기록하는 자다. 더불어 그 기록은 진실해야 한다. 서문에서 소설가 김훈 (그도 기자출신이다)이 썼듯이 지금의 기자들은 문장가다.  그러나 사실을 꾸며내는 문장가일 뿐이다. 사실이 곧 진실은 아니다. 진실은 세상을 울리고 변화를 시킨다. 그러나 사실은 그냥 사실일 뿐이다. 교통사고가 났다면 기자는 그 안에서 이야기를 끄집어 내고, 사후를 정립해야 한다. 그 과정은 지리하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경찰서를 들어가면 사건기록 장부가 있다. 아침에 서울에 있는 경찰서를 돌며 사건을 챙기는 수많은 기자들이 그 장부를 보고, 혹은 담당 형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쓴다. 일명 사건사고 스트레이트 기사다. 수많은 기자들이 여기서 기사의 마침표를 찍는다. 왜? 를 실종시킨다.


사람들은 말한다. "사건이 터지면 나오는 수많은 분석기사들도 있다. 그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미 터진 사건은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 밝혀진다. 또한 옳은 것인지 아닌지를 따지지않고 세상의 흐름에 맡겨 그안에서 '꺼리'를 찾으려는 기자의 시각은 한계가 존재한다.


어두운 곳. 그러기에 가슴 아픈 곳. 그러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곳으로 가야하는 기자들이 밝은 곳, 돈이 모이는 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세상에 알려야 될 문제는 보지 못하고 스스로의 시각안에서 알리고 싶은 이야기만 찾아 돌아다니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것들 말하고 있다. 저자의 기자수첩을 통해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밝혀야 될 문제를, 그리고 누구나 겪을 수도 있고, 겪었을 지도 모르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정희상 기자의 취재스타일이나 보도 스타일이 교본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 수준으로도 따라가지 못하는 수많은 기사와 이를 생산해내는 기자들은 꼭 읽어봐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잘났다고 생각되는 대한민국의 어두운 그늘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도 말이다.


책에서 간혹 나오는 이름들로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민주화의 대표성을 지닌 이들이라 생각되는 사람들이 거꾸로 그 민주적인 모습을 부정하는 내용이 종종 보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받아들이기 힘들고 괴로운 법이지만, 진실을 모른 채로 살아가는 것은 더욱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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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해소리
 

오늘은 1998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의문의 권총상을 입고 사망한 고 김훈 중위의 8주년 추모미사가 있던 날이다.


김훈중위의 죽음은 '시사저널'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고, 곧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켜 두 편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한편은 직접 김훈중위의 죽음에 대해 다뤘던 '진실의 문'이란 독립영화였고, 다른 하나는 공전의 히트를 쳤던 '공동경비구역 JSA'였다.


그러나 오늘 김훈중위의 추모미사에 대해서는 연합뉴스의 짤막한 단신뉴스로만 나왔을뿐 그 어떤 언론도 주목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무수한 뉴스꺼리때문인지, 아님 별로 사람들에게 주목받을만한 이야기꺼리가 아니였는지 몰라도, 그 어떤 언론들도 김훈중위에 대해 조명해주지 않았다.


김훈 중위의 죽음은 단순한 의문사가 아니다. 30년동안 군에 헌신한 중장출신 예비역 장성을 아버지를 둔 육군 장교의 죽음은 당시에 군 의문사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이 사건을 파고들었던 사람들은 '대한민국'에 회의까지 느껴 이민결심까지 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장성출신 예비역이 자신의 특권을 이용해 아들을 죽음을 이용해 군을 괴롭히고 있다"라는 음해성 비난에 넘어갈법도 한 다른 군 의문사 가족들이 (대개는 사병출신들) 도리어 "군 장성출신의 아버지도 자신의 군 의문사에 대해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데, 우리같은 서민들은 오죽하랴"라는 반박으로 군을 난처하게 하기까지 했었다.


당시의 자료를 보면 김훈중위의 '의문사'는 결코 자살일 수 없는 결론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런데도 국가는 귀를 틀어막고 "자살이라는 결론은 번복될 수 없다"라며 텔레토비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권총자살한 시체 한번 못만져본 국내 법의학자들이 한국계 미국 유명법의학자의 의견에 대해 "사대주의적이다"라며, 밥그릇챙기기식 행태까지 보이며 철저하게 군 편을 들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겪은 김훈중위의 의문사를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유는 바로 아직 우리가 징집제이고 내 아들, 내 형, 내 동생, 내 연인이 언제든지 입대해 당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군이 개인의 생명을 빼앗은 범죄를 저질러 놓고도 '명예' 운운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국가에 태어난 죄로 우리는 이같은 다소 무거운 주제를 끝까지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고 김훈 중위'를 '사회 문제'의 틀안에서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해방시키며 머리속에서 놓아버린다면 이는 동시에 국가가 저질를 수 있는 또다른 범죄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방치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23일 군의문사 진상규명위가 공식 출범했지만, 아직도 그 위원회가 미덥지 못한 것은 문민정부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정부의 끊임없는 책임회피성 '액션'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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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해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