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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공각기동대> 스토리가 세세하게 생각나지 않는 상황에서 이번 실사판 <공각기동대 : 고스트 인 더 쉘>을 접했다. 그러다보니 영화를 보면서 실시간으로 머리 한 쪽으로는 원작을 떠올리며 스토리를 구분해 이어나갔다. 물론 이번 <공각기동대>와 원작은 오프닝부터 달랐다.

 

원작은 쿠사나기 소령이 빌딩에서 떨어지며 시작한다. (유명한 장면이다). 그러나 실사판은 스칼렛 요한슨이 메이저로 변하는 (정확히는 개조되는) 과정을 시작에 내세운다. 루퍼트 샌더스 감독이 시간에 맞춰 친절한 설명을 하고 싶어서인지는 몰라도 원작의 강렬한 오프닝을 기억하는 팬이라면 당황할 수도 있다. 물론 시간 순서대로 흐름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후에는 이런 자잘한 비교를 할 수 없는 수준으로 넘어간다.

 

<공각기동대>는 전 세계 관객들에게 혼란스러운 생각거리를 던진 영화다. 1995년에 만들어진 이후 많은 미래 소재 영화에 영향을 미쳤다. 이번 실사판 제작 소식이 알려진 후, 화제와 논란이 일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원작 <공각기동대>가 던진 화두는 존재였다. 물론 인류사 수많은 종교인들과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거론했고, 나름의 답을 내놨다. 그들의 답은 나는 누구이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인간 중심의 존재론을 전제에 깔고 있다. 1995년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가 전 세계 관객들에게 충격을 줬던 이유는 바로 이 부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었다.

 

기계와 네트워크 세상에서 인간의 존재를 묻는다. 인간의 정신과 기계가 결합할 때 그 상태를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까. 혹은 인간의 정신이 네트워크라는 수많은 전기적 물질 상태와 결합, 연결됐을 때 이를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인간이 말하는 영혼과 인공지능이 자체적으로 가진 영혼은 뭐가 다를까. 인간의 존엄과 인공지능을 가진 기계의 존엄은 다르게 판단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원작 <공각기동대>에서 인형사는 너는 한낱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 존재다라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DNA라는 것도 자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지. 생명이라는 건 정보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돌연변이일 뿐이다라고 반박한다. 영혼을 DNA을 기반으로 한 것이고, DNA를 프로그램으로 재정의한다면, 인공지능의 존재 역시 인간의 존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답이 없는 혼란스러움을 주는 문제를 <공각기동대>1995년에 던진 것이다. 어찌 보면 인공지능의 영역이 미래가 아닌 현재형이고, 현실화된 지금은 진지하게 고찰하며 이야기 나눌 수 있지만, 당시에는 어찌보면 두려움의 영역일 수도 있었다. 이게 실시판에 대한 우려의 시작이다.



 

사실 스칼렛 요한슨이 메이저(모토코)를 어떻게 연기할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액션을 비롯해 다양한 연기를 선보인 그녀가 분명 <공각기동대>에서도 할리우드식으로 친절하게 관객들을 위해 충분한 연기를 보여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CG를 통한 화려함 역시 마찬가지다. 적잖은 언론들이 스크린 속 화려함을 극친하면서 미래 세계를 묘하고도 환상적이게 그렸다고 하는데, 이는 현 시대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서울, 홍콩, 도쿄 야경을 보거나 그것을 찍어서 조금 변형시키면 가능하다) 결국은 1995<공각기동대>가 던졌던 철학적 충격을 2017년 실사판에서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가가 관건이었다.

 

그러나 결론은 아니다이다. 스칼렛 요한슨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도 많이 그려지지 않았지만, 간혼 등장하는 모습도 존재에 대한 고민이라기보다는 여전사로서의 방향 설정같은 느낌이 들었다. 쿠제 역시 뭔가 철학적인 내용을 던지려고 여러 말을 하는데, 감정 이입이 전혀 되지 않는다. 원작이 던진 메시지를 오히려 반감시켰다. 그러다보니 할리우드식 화려함이 필요했던 이유가 이 같은 철학적 사고를 완성시키지 (혹은 지향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만들어진 듯 했다.

 

물론 앞서 거론했듯이 1995년과 2017년의 관객들의 경험과 의식은 다르다. 그렇다면 감독은 더 고민했어야 했다. 원작이 던진 메시지를 충실히 전달한다는 것은 사실 1995년의 던져진 메시지를 접한 충격보다 절반, 아니 10분이 1도 안 된다. 그래도 충실도에서는 합격점을 받았을 것이다. 만약 그 당시 충격도와 동일시 하려며 엄청난 재해석에 들어갔어야 했다. 그런데 감독은 이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다보니 결국 택한 것은 할리우드식으로 당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뿐이었고, 포지션은 어중간해졌다.

 

어찌 보면 원작을 안 본 관객들 입장에서는 스칼렛 요한슨으로 시작해 스칼렛 요한슨으로 끝나는 액션 영화로 받아들여도 되고, 여기에 아주 조금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즉 덜 진지해지면 <니키타> <5원소> <레지던트 이블> 등의 연이어 떠오르는 영화를 한 편 볼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아해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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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해소리


 

극장에서 본 첫 영화는 제목은 기억에 남지 않지만, 홍콩영화였다. 부모님 몰래 친구들과 들어간 지정석도 없는 극장 계단에서 난생 처음 본 거대한 화면은 그냥 멍한 기분만을 느끼게 했다. 그 후 다시 찾은 극장에서 본 서편제는 내가 접한 현실이 아닌 화면을 통해서도 내가 눈물을 흘릴 수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그렇다고 무슨 영화배우나 감독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렇게 영화를 보는 것이 즐거웠고, 독서실을 간다는 핑계로 역 주변 동시상영극장을 일주일에 한번정도는 꼭 찾아갔다. 지정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편을 봤다고 쫓아내는 것도 아니었기에 같은 영화를 하루에 2~3번씩 볼 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무슨 영화를 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그때 호기심어린 마음으로 영화를 순수하게 즐겼을 뿐이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지금 난 영화를 보러가기 껄끄러워졌다.

어느 때부터인가 영화는 기억의 대상이고 분석의 대상으로 변했다. 어느 감독에 대한 영화류를 따져야 하며, 상업주의 영화가 분명 관객을 끌어들이는 재미가 있음에도 왠지 극장 안에 발을 들여놓는 심정은 씁쓸하다. 길거리 가판대에서 집어든 영화관련 잡지도 손에 쥐기조차 무겁다. 한쪽 손에 든 가방보다도 질량적 무게감은 분명 가벼운데도, 심적 무게감은 이를 훨씬 상회한다.


“이 영화 정말 재미있지 않냐? 주인공이 그렇게 연기를 잘할 수가 없더라. 화면 역시 이쁘던데. 어쩜 그리 잘 만들었냐” 영화 관람 후 식사라도 하면서 이런 식의 말을 하면 이제는 무식하다는 말을 듣는다.


“영화의 콘텍스트의 흐름이 뛰어나던데. 주인공의 감정몰입이나 등장인물들의 시선변화는 특히 더 그렇고. 비주얼은 또 어떻고” 이런 식의 어설픈 단어나열이라도 해야 뭔가 아는 듯한 그리고 느끼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냥 그렇게 즐겁게 본 영화보다 왠지 해석하려는 이들의 평이 답답하다.


그러나 이들의 잘못이라기보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 그 영화를 해석한 수많은 일간지, 잡지, TV들의 문제는 아닐까?
“이 영화는 000감독의 작품 세계가 지속적으로 회귀하는 비현실적이고 판타지적인 공간으로 도약해간다.” 어느 잡지에 나온 평론의 일부분이다. 관객들은 이를 따라할 뿐이다.
사실 영화는 그냥 즐기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감독들은 그 안에 수많은 메시지를 드러내 보이려 애쓰고, 이를 평론가들은 더 어렵게 해석하고, 관객들은 다시 ‘즐김’의 주체에서 점차 벗어나버린다. 오로지 웃음만을 자아내게 하는 영화는 왠지 모르게 ‘저급’으로 취급되어 무슨 영화잡지에서 보여주듯이 매번 엄지손가락이 아래로 향하게 만든다. 즐기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일까?

‘이노센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 후편이다. 조금 오래전 영화다. 전에 같이 본 사람들의 중론은 나오는 대사만 대충 합해도 철학서적 한권은 나온다고 말한다. 영화를 보면 새로운 생각에 대한 몰입이 즐김일 수도 있다. 문제는 다시 그 생각을 풀이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어찌보면 이노센스나 공각기동대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또한 메시지 역시 간단하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매트릭스를 보면서도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지금 실재하는 인간의 모습이 진짜 인간의 모습인가라는 질의가 영화의 중심생각이다.

공각기동대의 소좌가 아무도 자신의 뇌를 본 사람이 없다고 말한 것이나 어느 책에서 언급했듯이 사람이 눈을 통해 비추는 감각의 영상이 아닌 실질적인 인간의 모습은 그 누구도 본 적이 없기에 인간은 허구라는 식의 논리를 지리한 책이 아닌 영화로써 접근한 것은 어찌보면 뛰어난 방법이다. 하지만 관객들 대다수는 그것에 그리 광분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보면 1990년대 유행하던 홍콩 느와르에서 주윤발이 천천히 등장하는 장면이나 유덕화가 멋지게 카드를 상대에게 던지는 장면이 더 마음에 와닿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의 영화는 관객에게 계속 알수 없는 질문던지기 놀이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여타 문화도 그러하겠지만 영화는 지금 군림과 무거운 메시지 전달 그리고 사업의 측면에서만 논해지고 있지, 실제 그 영화를 즐기려는 관객의 입장은 돌아보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관객이 영화의 수준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틀에 영화의 수준을 정해놓고, 그에 따라 관객수준까지 결정짓는 시스템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무거운 메시지 전달은 마치 반드시 들어가야 할 옵션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틀 안에서 벗어나거나 어설프게 이 틀에 끼워 맞추려면 곧 사장된다. 물론 살아남는 방법도 있다. 일종의 외부로의 평가. 즉 외국에서 수상하고 들어오면 국내에서의 평가는 180도 달라진다. 이 때부터는 그 영화가 일종의 ‘틀’의 한 부분을 대체하게 된다.

현대에 와서 모든 의식과 개체들이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지만, 무슨 독재시대 사상전파의 나팔수도 아니고 즐김의 대상이 되는 문화의 한 부분을 점차 의식화시키는 것은 되짚어봐야 할 문제다. 물론 특정의식의 전파 - 예를 들어 학교문제를 고발한다던가 하는 -를 위한 작업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아예 초반부터 상업주의적임을 표방하고 나선 영화들조차 기존의 사상적 잣대로 분석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싶다. 그리고 이런 작업에 ‘좀’ 안다는, 그리고 ‘제법’ 영화를 봤다는 사람들이 나서서 관객들의 ‘즐김의 권리’를 박탈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글래디에이터에서 황제의 손가락의 방향에 따라 한 인간의 목숨이 좌지우지되듯 그들이 주는 별 몇 개와 손가락의 방향이 한 영화를 좌지우지하고, 다양한 관객들의 성향을 몇 개의 층으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난 과거 중학교때 본 영화를 계속 떠올리려 노력하지만 내용이 기억이 안난다. 1천원짜리 동시상영극장에서 몇 번에 걸쳐 본 영화들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느낌은 분명 살아있다. 대낮에 몇 명 안되는 사람과 같이 보면서, 혹은 주말에 계단에 앉아서 무엇인지 모지만 다른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저려오는 가슴의 느낌은 손에 잡힐 듯 남아있다. 영화를 보면 어느 새 따지게 되는 지금의 나로서는 다시는 느끼기 힘들 듯 싶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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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해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