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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 영화의 적은 ‘반전에 익숙한 관객’이다. 아무리 곳곳에 트릭을 만들어놔도, 이들 관객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 게다가 초반에 만일 그 패가 읽힌다면, 영화는 힘을 순식간에 잃어버린다. 그래서 어느 정도 내공이 있는 영화가 아니면, 한국에서 반전 영화는 관객에게 호평을 받기 힘들다. (더구나 사회 전체가 어느 순간 음모와 불신이 서로 얽히고설켜 반전 그 이상의 분위기가 형성된 상황이라면 더더욱 어렵다)

영화 <꾼>이 가진 매력인 ‘반전’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다.

<꾼>은 3만 명에게 4조 원대 사기를 친 조희팔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이전에도 영화 <마스터>가 조희팔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색(色)은 전혀 다르다. <마스터>가 '경찰 vs 사기꾼‘ 이었다면, <꾼>은 ’사기 피해자 가족 vs 사기꾼 비호 권력‘이다. 그러다보니, 좀더 촘촘하게 연출이 필요했다. <마스터>가 큰 힘을 가진 자들의 충돌이라면, <꾼>은 큰 힘을 가진 자에 대한 피해자들의 대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초반에 <꾼>은 패를 내보이며 “이렇게 전개될 겁니다”라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말았다.

우선 현빈의 변장술이다. 정말 많이 아쉬운 장면이다. 어설픈 변장은 현빈임을 누구나 알게 했다, 이강석(최덕문)이 극에서 현빈의 변장술을 알아채지 못하고, 거꾸로 유지태 일당이 현빈이 변장했음을 알아채는 순간 현빈의 첫 의도가 읽히게 된다. 치밀하다고 극중 소개된 현빈이 CCTV에 자신의 모습을 대놓고 드러내는 장면 역시 ‘수’를 보인 상황이다. (변장을 감독이 일부러 어리숙 하게 한건지, 아니면 변장술의 한계인지는 모르겠다)

현빈이 장두칠(허성태)에게 풀려났다는 배경 이야기는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그 이야기가 좀더 치밀하게 그려졌어야 했고, 그 때문에 현빈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음이 드러났어야 했다. “어렵게 탈출했다”는 말 한마디 때문에 이야기 흐름은 모두 읽히게 된다. 사실 조금만 눈치 있고, 반전에 대해 익숙한 관객이라면 이 부분에서 이야기는 끝난다.

마지막은 박성웅의 캐릭터다. 희대의 사기꾼이 국내 일정을 맡길 정도의 인물이, 등장 이후부터는 그렇게 어리숙할 수 없다. 유지태가 정말 냉철하고 몇 수를 읽는 검사 캐릭터였다면, 박성웅의 행동은 ‘이상함’ 그 자체다. 물론 마지막에 ‘왜’ 그런지는 알게 됐지만, 그 마지막 때문에 과정을 망친 셈이다. (영화 <찌라시:위험한 소문>의 박성웅 캐릭터의 반만 나왔어도 이야기 흐름은 달라졌다)

결국 현빈이 그림을 그렸고, 극 전체는 이 그림에 따라 가고, 유지태는 그 안에서 허우적댄다는 사실을 영화 초반에 알아버렸는데, 영화가 흥미진진하게 보일 리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연출의 문제다. 배우들의 각자 자신이 가진 캐릭터를 잘 소화해냈고, 나나처럼 의외의 모습을 보인 인물도 있다. 이런 장점을 연출이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결국 장창원 감독은 극중 현빈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자신은 영화 전체의 그림을 그리지 못한 셈이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그럼 영화가 재미 없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아니다. 영화는 나름의 상업 영화의 면면을 충실히 소화해낸다. ‘킬링 타임용’으로 괜찮은 수준이고, 배우들의 연기력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름 괜찮다. 단지, 이런 류의 영화가 이런 수준으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성적을 올린다면, 이후에도 여전히 ‘반전’의 묘미를 살리는 영화의 수준은 올라가지 않을 거 같다.

- 아해소리 -

Posted by 아해소리




글, 말, 논쟁, 명분, 실리... 조선 시대 지배층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긍정적으로 표현하든, 부정적으로 표현하든, 이 단어들은 어김없이 등장했고, 지금까지도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영화 <남한산성>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겁겠다”라고 생각했다. 당연하다. 400페이지에 가까운 소설은 어느 한번 빈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380년 전의 스산한 겨울의 분위기를, 초췌한 백성들의 처참함을, 각기 다른 생각으로 왕과 나라를 생각하는 어느 신하들의 절규를 고스란히 전달했다. 글 하나가 문장 하나가 생명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영화로 옮겨지면서 소설이 보여주는 스펙트럼은 줄어드는 대신, 한 곳에 집중해 밀도감을 높였다. 백성과 병사들의 이야기는 줄어들었고, 왕과 신하들의 이야기 즉 지배층의 스토리에 초점을 맞췄다. 앞서 언급한 글, 말, 논쟁, 명분, 실리가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남한산성>을 중심적으로 가득 채우는 것은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의 말(言)이다. 순간의 치욕을 참더라도 조선의 명맥을 이어가려면 청나라에 항복을 해야 한다는 명길과 대의를 위해 끝까지 청과 싸워야 한다는 상헌의 논쟁은 영화 지분의 8할 이상이다.

이들의 논쟁이 다른 신하들의 흐름을 잡고, 인조(박해일)의 생각의 방향을 제시하며, 청의 움직임을 예측케 한다. 관객도 마찬가지다. 상헌의 말에 따라가다가, 명길의 말을 이해한다. 그러다가 다시 상헌의 입에 눈길을 보내다가, 명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이들의 말은 충돌해 부서졌다가 다시 합쳐지고, 그 과정에서 갈려서 빛을 내다가 굳건한 칼이 된다. 상대를 베기도 하고, 나를 지키기도 하지만 거꾸로 상대의 힘(생각)을 키운다.

과거 어느 이가 통찰력 있는 이들의 논쟁은 무협지 속 고수와 같다는 말을 했는데, 이병헌과 김윤석이 보여주는 최명길과 김상헌의 논쟁이 그러한 느낌을 준다.

영화와 소설 속 명길과 상헌은 분명 왕과 국가를 위한다. 결과적으로 누가 맞고 틀리다를 논할 수 없다. 그건 결과론적인 해석이고, 그 시대를 살지 못한 후손들의 일방적 판단이다. 하다못해 항복문서를 쓰지 않으려 하는 대신들, 즉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부정적으로 남기지 않으려는 이들의 모습도 어느 시점에서 판단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최명길이 후세에 다양하게 평가되거나 김상헌이 이와 대비돼 평가되는 등의 역사적 사실은 논외로 하자)

이들 명길과 상헌의 말의 겨룸에 간간히 의지를 내보이는 인조의 말도 얄팍하긴 하지만, 스스로 힘을 발하긴 한다. 다른 신하들의 말이 공감 안되는 명분과 스스로의 삶을 위한 것으로 비쳐진 것에 비해 그나마 인조의 말은 주체적 이려고 애 쓴다. (이 부분에서 박해일 캐스팅이 안성맞춤이라는 평가도 있다. 나약한 이미지이면서도 자존심은 놓으려 하지 않는 지질함을 잘 드러내는 배우라는 평)

앞서 언급했듯이 이런 말의 부딪침에 포인트를 맞추다보니,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공간의 스산함과 백성들의 고단함의 표현은 다수 무뎌졌다. 그 때문일까. 서날쇠(고수)와 동생(이다윗)의 존재감은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다. 도리어 소설에서는 흐름의 한 축을 맡았던 서날쇠가 영화에서는 존재감이 흐려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수라는 배우의 존재감이 서날쇠라는 인물의 역할의 방향을 틀어버린 것이다. 소설의 서날쇠는 시대를 보여주고, 백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였다면, 영화 속 서날쇠는 갑자기 영웅이 되어 있다. 한낱 대장장이가 무관을 손쉽게 제압하고, 군대의 눈을 피해 도망가는 수준이니 말이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상업적으로’ 잘 만들었다. 누구의 말처럼 영화를 본 후에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명길과 상헌의 입장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49일간의 어두운 시대상을, 치욕적인 조선의 역사를 그려낸 영화 치고는 짙은 여운은 의외로 없는 편이다. 보는 이들마다 다르겠지만, <광해>의 경우에는 몇 번을 보더라도 여운을 남기는 포인트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 부분에는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광해>는 감성을 건드리는 연출이었다면, <남한산성>은 이성을 표현하는 연출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광해>는 인물과 인물이 감정을 섞었지만, <남한산성>은 말과 말이 충돌하고 갈린다. 여운은 감성을 건드릴 때 나온다. 이것이 흥행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예상할 수 없다. 배우들의 호연에 무게를 둘지, 여운에 무게를 둘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 아해소리 -

Posted by 아해소리



영화 속 내용이 개봉 시점과 절묘하게 결합했다. 2년 전부터 만들었다고 하니, 지금의 대선 상황을 고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보는 내내 지금의 상황을 떠오르면 피식 웃음이 이어져 나온다.

'특별시민'은 선거에 대한 이야기다. 내 기억 속에 정치와 정치인을 다루는 영화는 종종 봤어도, 선거 자체를 다루는 영화는 이것이 처음이다. (기억이 안 나는 것일 수도 있다)

영화는 서울시장 3선에 도전하는 변종구(최민식)와 그에 맞서는 야당 후보 양진주(라미란) 간의 대결 구도를 기본 클로 한다. 여기에 변종구 측 선거대책본부장 심혁수(곽도원), 양진주 측 선거 전문가 해외파 임민선(류혜영), 선거전에 갓 입문한 광고 전문가 박경(심은경)의 이야기를 담았다

서울시장 선거판을 다뤘다는 설정은 듣기만 해도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맞다. 추잡하다. 대체적으로 변종구 측은 조작을 통해 네거티브 전략을 구사한다면, 양진주 측은 어쩌다 던져진 꺼리를 활용한다. 그러다보니 번본히 변종구 측에 당하는 입장이긴 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 둘은 당선을 목표로 구사할 수 있는 전략을 다 구사하려 한다. 이 시점에서 눈 여겨 볼 대상은 임민선과 박경이다. 임민선은 선거 전문가이긴 하지만, 해외파로 한국 선거는 처음이다. 박경은 선거전 자체가 처음으로, 정치에 대한 순수한 마음이 살아 있다. 이들은 라이벌 관계의 선거 캠프에 있고, 나름 상대를 엿먹이는 선거전략을 구사하지만, 후보들은 진정한 정치인으로 남아있길 바란다. 여기서 충돌이 일어난다.



깨끗하고 네거티브 없는 선거는 언제나 등장하는 구호지만, 역대 그 어느 선거에서도 지켜지지 않았다. 후보는 깨끗하게 걸어가더라도, 그 주위에서 선거를 치르는 사람들은 똥물을 밞고 서 있다. 이들은 선거 후 자신들에게 돌아올 몫을 알기에 이 똥물을 밞고 서서, 후보를 어깨 위로 들어올린다.

그런데 그 무리에 '깨끗하고 공정하며 네거티브 없는 선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될까. 버티지 못한다. 임민선과 박경이 그랬고, 그래서 그들은 결단은 이해하면서도 수긍하기는 힘들다.

이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심혁수는 대한민국 선거판을 제대로 대변하는 인물이다. 후보와 갈등이 있더라도 일단은 당선시켜놓기 위해 똥물이 아니라 핏물이라도 밞을 인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심혁수 현실판' 인물들이 지금 대선판에 깔렸다.



재미있는 것은 임민선과 박경의 모습은 현실의 대선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자극을 주지 못하지만, 심혁수의 모습은 다르다. 심혁수의 행동과 생각은 현실 대선의 과정에 이래저래 끼워 맞춰 해석케 했다.

영화는 중간에 '과실로 인한 죽음'이라는 너무 극적인 두 가지 설정을 제외하고는 꽤 자연스럽게 이어져 간다. 나름의 반전도 존재한다. 그리고 미디어에 의해 얼마나 사람들이 쉽게 조작되고 흔들리는지도 보게 된다.

특히 엔딩은 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뻔한 결말이 아니라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적잖은 개인적 해석을 하게 했다. 입 다물게 하고 모든 것을 먹어치우겠다는 모양새다.

참고로 변종구의 당은 새자유당이다. 여기서. 피식웃었다. '새누리당+자유한국당'을 합친 느낌이다. 영화 관계자는 새누리당이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꿨을 때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그리고 양 후보가 각각 아들과 딸의 문제가 공론화된다. (물론 딸의 문제는 조금 다르지만) 현재 문재인과 안철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27일 개봉 후 영화를 본 이들은 5월 9일 대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하다.

- 아해소리 -

ps. 류혜영의 미모가 물이 올랐다.


Posted by 아해소리



16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개최된 콜드플레이(coldplay) 콘서트는 고민되던 공연이었다. 새월호 3주기인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콜드플레이가 이런 눌린 마음 일부를 날려줬다.

첫 곡이 끝나고 두번째 곡인 '옐로우'(Yellow) 중간 크리스 마틴은 관객들에게 10초간 침묵으로 추모하자고 제안했다. 무대 스크린에는 노란 리본이 그려졌다. 크리스 마틴의 손목에는 노란 밴드가 보였다. 순간 울컥했다.

어느 이들은 말한다. 콜드플레이가 꼭 이날 공연을 했어야 했냐고. 사실 나도 이 생각이 들긴 했다. 조금 현대카드에서 달리 잡을 수 없었을까.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세월호 추모일을 콜드플레이 월드투어 일정에 강요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간 생각이 세월호 3주기에 모두가 정지될 필요는 없다는거다. 추모의 방법과 공간이 안산이든, SNS든, 공연장이든 상관이 없다.

공연관계자가 콜드플레이와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던 콜드플레이는 5만(이틀간 10만) 관객들에게 세월호 추모의 시간을 줬고, 오히려 이날을 넘어갈 뻔했던 이들에게도 기회를 줬다.

콜드플레이 곡 중에서 위로의 곡이 많다는 것도 어찌보면 이런 애도의 뜻을 조금이라도 살려주지 않았나 싶다.



물론 이날 공연은 애도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어느 때는 클럽 분위기로 어느 때는 놀이공원 같은 분위기로 휘몰아쳤다. 이는 당연하다. 원래 이런 콘서트였다. 단, 몇 분이라도 10만 관객들에게 애도의 시간을 줬다는 것이 중요하다.

콜드플레이는 이날 적잖은 팬을 더 확보했을 것이다.

아 하나 더. 크리스 마틴은 이날 태극기를 들고 나왔고, 관객들은 환호했다. 광화문과 삼성동에서 잘못 사용된 태극기가 오랜만에 제재로 대접받은 날이다.

- 아해소리 -


Posted by 아해소리


사실 <공각기동대> 스토리가 세세하게 생각나지 않는 상황에서 이번 실사판 <공각기동대 : 고스트 인 더 쉘>을 접했다. 그러다보니 영화를 보면서 실시간으로 머리 한 쪽으로는 원작을 떠올리며 스토리를 구분해 이어나갔다. 물론 이번 <공각기동대>와 원작은 오프닝부터 달랐다.

 

원작은 쿠사나기 소령이 빌딩에서 떨어지며 시작한다. (유명한 장면이다). 그러나 실사판은 스칼렛 요한슨이 메이저로 변하는 (정확히는 개조되는) 과정을 시작에 내세운다. 루퍼트 샌더스 감독이 시간에 맞춰 친절한 설명을 하고 싶어서인지는 몰라도 원작의 강렬한 오프닝을 기억하는 팬이라면 당황할 수도 있다. 물론 시간 순서대로 흐름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후에는 이런 자잘한 비교를 할 수 없는 수준으로 넘어간다.

 

<공각기동대>는 전 세계 관객들에게 혼란스러운 생각거리를 던진 영화다. 1995년에 만들어진 이후 많은 미래 소재 영화에 영향을 미쳤다. 이번 실사판 제작 소식이 알려진 후, 화제와 논란이 일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원작 <공각기동대>가 던진 화두는 존재였다. 물론 인류사 수많은 종교인들과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거론했고, 나름의 답을 내놨다. 그들의 답은 나는 누구이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인간 중심의 존재론을 전제에 깔고 있다. 1995년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가 전 세계 관객들에게 충격을 줬던 이유는 바로 이 부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었다.

 

기계와 네트워크 세상에서 인간의 존재를 묻는다. 인간의 정신과 기계가 결합할 때 그 상태를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까. 혹은 인간의 정신이 네트워크라는 수많은 전기적 물질 상태와 결합, 연결됐을 때 이를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인간이 말하는 영혼과 인공지능이 자체적으로 가진 영혼은 뭐가 다를까. 인간의 존엄과 인공지능을 가진 기계의 존엄은 다르게 판단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원작 <공각기동대>에서 인형사는 너는 한낱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 존재다라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DNA라는 것도 자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지. 생명이라는 건 정보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돌연변이일 뿐이다라고 반박한다. 영혼을 DNA을 기반으로 한 것이고, DNA를 프로그램으로 재정의한다면, 인공지능의 존재 역시 인간의 존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답이 없는 혼란스러움을 주는 문제를 <공각기동대>1995년에 던진 것이다. 어찌 보면 인공지능의 영역이 미래가 아닌 현재형이고, 현실화된 지금은 진지하게 고찰하며 이야기 나눌 수 있지만, 당시에는 어찌보면 두려움의 영역일 수도 있었다. 이게 실시판에 대한 우려의 시작이다.



 

사실 스칼렛 요한슨이 메이저(모토코)를 어떻게 연기할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액션을 비롯해 다양한 연기를 선보인 그녀가 분명 <공각기동대>에서도 할리우드식으로 친절하게 관객들을 위해 충분한 연기를 보여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CG를 통한 화려함 역시 마찬가지다. 적잖은 언론들이 스크린 속 화려함을 극친하면서 미래 세계를 묘하고도 환상적이게 그렸다고 하는데, 이는 현 시대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서울, 홍콩, 도쿄 야경을 보거나 그것을 찍어서 조금 변형시키면 가능하다) 결국은 1995<공각기동대>가 던졌던 철학적 충격을 2017년 실사판에서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가가 관건이었다.

 

그러나 결론은 아니다이다. 스칼렛 요한슨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도 많이 그려지지 않았지만, 간혼 등장하는 모습도 존재에 대한 고민이라기보다는 여전사로서의 방향 설정같은 느낌이 들었다. 쿠제 역시 뭔가 철학적인 내용을 던지려고 여러 말을 하는데, 감정 이입이 전혀 되지 않는다. 원작이 던진 메시지를 오히려 반감시켰다. 그러다보니 할리우드식 화려함이 필요했던 이유가 이 같은 철학적 사고를 완성시키지 (혹은 지향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만들어진 듯 했다.

 

물론 앞서 거론했듯이 1995년과 2017년의 관객들의 경험과 의식은 다르다. 그렇다면 감독은 더 고민했어야 했다. 원작이 던진 메시지를 충실히 전달한다는 것은 사실 1995년의 던져진 메시지를 접한 충격보다 절반, 아니 10분이 1도 안 된다. 그래도 충실도에서는 합격점을 받았을 것이다. 만약 그 당시 충격도와 동일시 하려며 엄청난 재해석에 들어갔어야 했다. 그런데 감독은 이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다보니 결국 택한 것은 할리우드식으로 당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뿐이었고, 포지션은 어중간해졌다.

 

어찌 보면 원작을 안 본 관객들 입장에서는 스칼렛 요한슨으로 시작해 스칼렛 요한슨으로 끝나는 액션 영화로 받아들여도 되고, 여기에 아주 조금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즉 덜 진지해지면 <니키타> <5원소> <레지던트 이블> 등의 연이어 떠오르는 영화를 한 편 볼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아해소리 -

 

 

 


Posted by 아해소리